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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에 대해서

학교라는 공간은 종종 작은 사회, 작은 왕국으로 그려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드라마나 웹툰 등의 작품에서,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나타나는 권력 관계를 주제로 삼은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학교라는 공간은 독자적인 체계와 rule을 가진 곳인 것.

그 안에서의 양상은 집이나 사회와는 다르게 돌아간다. 밖에서는 다른 사람일지라도 학교 안에서는 학교의 룰을 따라야 하니까.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그들에게 허용되는 행위과 그렇지 않은 행위에 대한 규칙을 따르듯이. 이건 명시적이기도 하고 암묵적이기도 하다. 또한 파놉티콘 얘기를 들으면서 떠올린 건, 이러한 규칙에 학생들이 스스로 따를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자체적으로 규제하는 역할도 한다는 것. 때로 학생들은 룰을 따르지 않은 또래를 비난하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며, 이런 학생들을 교사는 ‘참 예의 바른 학생’이라고 칭찬한다. 이런 행동이 강화되는 것. 마치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자기가 다른 관람객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는 지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설명처럼… 학교는 이런 곳이다, 라는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인식이 영향을 끼치는 것임.

 

수업이 시작되면, (특히 아시아권, 특히 한국 교실에서는) 교실이란 공간은 교사가 장악하는 공간이 된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수업시간에 교사가 아닌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지양된다. 교사가 지명을 할 경우에만 말을 한다.

 

교실의 장치 – ‘종’ 수업종, 교실의 형태(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는 모습)

 

수업종: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종이 치면 수업에 들어가고, 또 종이 치면 쉬고, 또 종이 치면 밥을 먹으러 가고 그런다. 알아서 시간표에 따라서 움직인다. 마치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의 공간 이동 방향을 설정하듯이

 

교실의 형태: 나는 사실 이 토론 수업에서 서로 마주보고 둘러앉아 있는 게 처음에 무척 낯설었다. 우리나라의 교실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 교사만 보고 있으면 되니까. 디스플레이 자체도 모두 앞을 보는 식으로 되어 있고. 가끔 토론 수업을 하거나 하면 모둠을 만들어 앉게 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교실의 모습은 저렇다. 자연히 일방적으로 교사의 말을 수용하는 형태가 되는 것 같다.

 

교실의 장치 – 교실 벽은 왜 흰색일까? 나는 중학교 때 모든 학교의 겉이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교실 벽은 흰색이며, 바닥은 칙칙한 회색인 이유가 궁금했다. 무슨 정신병원도 아니고..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특수 고등학교였는데, 말하자면 시험을 치고 들어온 선별된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학교는 우리를 다른 일반 고등학교와 다르게 만들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학교에 가서 놀랬던 점은 공간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 (사진 보여주면 좋을 듯) 복도에는 밝은 색으로 꾸며진 라운지가 있고, 큰 칠판이 있어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거나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자율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다양하고…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학교에서 우리를 배려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이게 대학에서 원하는 소위 말하는 ‘창의적인 인재’ 기르기를 위한 형식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도 있고.

 

학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교실은 복도에서 누구나 지켜볼 수 있도록 훤히 뚫려 있다. 파놉티콘 정도는 아니지만. 기숙사학교의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기숙사의 문을 잠구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선생님들이 언제든지 학생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몰래 밤에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불을 켜고 있는 것은 금지다. 선생님은 언제든지 문을 열고 우리에게 잘못을 따질 수 있다.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아래가 살짝 떠 있어서, 학생들이 안에서 불을 켜고 있으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학교라는 공간의 담론적 장치를 통해 생산되는 사회적 주체는 학생들이다. 특히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어디에 가든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의 말을 따른다. 약간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기분? 세월호 사건에서도 지적되었던 게, 안내 방송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요즘은 교육 개혁이니 뭐니 하면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이런 선생-학생 간의 수직적인 관계는 우리나라의 베이스에 깔린 유교 문화로부터도 기인하는 것 같다. 나는 사범대생인 만큼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되는데, 외국에서와 한국에서의 선생이라는 직업의 위상의 차이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교사라는 직업은 많은 존경을 받는데, 유교 문화에서 ‘스승’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말라는 속담도 있을 정도. 이런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서구의 토론식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대학에 와서도 주로 교수가 일방적으로 말해주는 것을 듣고 ‘배우는’ 입장이니까. 수업시간에 활발하게 질문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주로 듣고, 생각하는 반면 외국의 학생들은 서로 대화를 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 같다. 약간 산파술 스럽달까… 우리는 수업시간에는 주로 듣고 특정 개념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운 후, 혼자 공부하면서 익히는 식이다. 물론 스터디 같은 것도 하지만. 이 방식 자체가 대한민국의 학교라는 공간이 produce 한 학생들이니까.

 

그렇게 수동적인 학생들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대학에 갑자기 던져 놓고 수업도 니가 알아서 챙겨라, 하고 싶은 것도 알아서 해라, 진로도 알아서 찾아가라 하면 학생들이 당연히 혼란이 올 수 밖에 없지. 회사에서도 수직적인 관료제적인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많지만, 사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produced 된 주체들인데 그게 바뀌기가 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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